#투루판 -화염산.베제크리크 .고창석굴
투르판은 중국지역과 이란지역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 투르판은 국제도시의 느낌이며 투르판의 인구 구성은 복합적이다 중국에서 온 이주민과 사마르칸트 주변 소그디아나에서 온 이주민의 비중이 가장 컸다 고창국 건립은 북위 (386-534)에 패한 북량(401-439)의 저거무휘와 저거안주 형제가 도주하여 고창에 자리잡았다 이어 저거안주가 448년에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 거사전국을 포함한 투르판 분지 일대를 지배한다 이것이 고창국의 기원이다 거사인들은 서쪽 옌치로 이주하므로 이로써 거사전국(차사족)유목민은 투르판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후 460년에 저거안주가 유연에 의해 살해되고 이러서 유연을 배경으로 한 한인의 괴로정권인 감백주정권이 설립한다 이 정권은 새로운 한인계 투르판 왕국 시초가 되었다 감씨정권은 초원 세력 고차와 에프탈의 간섭으로 491년에 붕괴되고 고차는 둔황사람 장맹영을 고창 왕으로 앉힌다 그러나 장맹영을 계승한 마유가 북위(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나라)와 내통하려 하자 고차는 그를 살해하고 502년에 "국가라는 사람을 왕으로 세운다 이렇게 하여 국씨를 중심으로 한 고창국이 성립되었다 북방에서 돌궐이 552년에 유연을 격파한 뒤 카간의 국보무에게 시집 보내고 투르크의 고유의 칭호인 알테베르를 부여하는 등 투르판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 하려했다 그후 고창국 국백아시대 수나라 (581-618)에 이때 고창국은 진행되었다 630년에 당이 동돌궐을 무너 뜨리고 동쪽 하미일대를 장악하자 그들을 두려워한 국백아 아들 국문태는 서돌궐과 연대 하고자 했다 그는 서돌궐로 부터 알테베르 칭호를 받고 누이를 서돌궐 통엽호 카간에게 시집 보내는 등 당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지만 640년에 당나라 원정군에 굴복한다 고창국의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 국문태 현장을 맞이하여 대접했던 바로 그였다 국문태의 아들은 포로가 되어고 그곳에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토지를 동일하게 분배되는 균전제를 실시되었는데 당시 당나라 전역에서 시행되던 제도였다 이후 당나라 안록산의난 당나라 황제 현종712-756은 휘하의 군사들이 반란군에 합류할까 두려워서 부하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안록산(소그드인 아버지와 투르크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중국 군대에 말을 공급하는 일을 하다 나중에 장군이 되어 서로 다른 세 곳의 군사 진휘권을 가졌다) 과 염문이 떠돌던 양귀비를 목졸아 죽이도록 부하들에게 내주었고 아들 숙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 755년에 중원지역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자 어쩔수 없이 위구르 용병을 동원하여 반란에 맞섰다 763년에 당나라는 겨우 반란을 잠재울수 있었다 당나라가 반역자로 부터 통치권을 회수하는 동안 위구르 용병들은 762년 낙양을 점령하였다 50년 뒤 투르판은 위그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위구르 지도자는 소그드인 스승을 만나면서 마니교를 민족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이고 세개의 언어 (소그드 어 .위구르어 중국어) 로 새긴 비석을 새웠다 티베트제국은 반란 당시 당나라 약점을 파고 들어 780년에 감숙성 지역에 들어 왔고 786년엔 투르판 바로 북쪽 북정도호부를 점령792년 투르판도 점령했다 803년에는 위구르가 티베트로 부터 투르판을 빼앗았다 몽골 지역에 있던 위구르는 키르기즈에게 의해 840년에 무너지면서 이들 중 일부가 투르판으로 철수하여 투르판에서는 866-872년 사이에 위구르 카간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고창에 두었다 두번째 위구르 카간국은 감주 동쪽에 근거지를 두었다 1209년 몽골이 투르판 위구르 카간국을 정복했지만 위구르 카간은 자리를 그대로 유지되었다 1275년 위구르는 쿠빌라이 칸을 지지하다 1283년쿠빌라이의 반대편에서 위구르 카간국을 정복하자 위구르 왕실은 감숙성으로 도망쳐 그곳에 정착했다 14세기에 농민 반란으로 중국의 몽골 통치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수립되었지만 투르판은 중국에 복속되지 않고 몽골의 지배 아래에 머물러 있었고 나중에는 몽골의 차가타이 계열에 복속되었다 1383년 무슬림 히즈르 호자Xidir Khoja 재위 1389-1399가 투르판을 정복했고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 그후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주된 종교가 이슬람이다 1756년 청나라 침략을 받을 때까지 투르판은 독립을 유지했다 안록산의난 이후로 843년 무황제는 이민족 대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불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를 금지 했고 그 후로 2년 뒤 마니교를 금지 시켰다 황제의 목표는 동전을 주조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함으로 동상과 종을 녹이라고 명령함 몇몇 불교사원을 제외한 모든 종교의 재산은 몰수 한다 877년 광주에서 황소의 난으로 무슬림 유대인 조로아스터교도 많은 이민족이 살해 당한다 광주에서 일어난 황소의난은 소금 장수 황소로 부터 반란이 일어난 장안을 장악 하여 대제국이라고 내걸음 희종은 사천으로 피신 그때 시타출신 이득용이 내란을 수습 황소의 부장 주온이 배신하고 주전충으로 하사 받음 그의 세력이 강해지자 황소는 자결한다 소종의 재상 최윤은 환관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주전충군대를 장안으로 불러들인다 이 계획이 누설되어 환관은 소종을 이끌고 봉상으로 도망가 절도사 이무정에게 의탁한다 주절충은 환관을 주살한다 최윤은 반역할것 예방하려다 주전충에게 살해 당한다 주온(주전충)은 황제(소종)를 죽이고 주전충은 애제를 폐위시키고 후량를 건국하지만 5대 10국으로 나눠져 50년간 혼란기에 들어간다 황소의 반란 이후에 시인 위장이 "장안"을 이렇게 표현했다 쓸쓸한 장안에는 이제 무엇이 남았나 황폐한 시장과 길거리에 보리싹이 나네 행원의 꽃나무는 땔감으로 다 베어가고 궁궐 냇가 버드나무는 장애물 쌓느라 다 베었네 화려했던 수레장식 모두 흩어지고 저택의 븕은 대문 반도 남지 못했네 함원전 위에는 여우 토끼 오가고 화악루 앞에는 가시나무 가득하네 옛날의 번성은 모두 사라지고 눈을 뜨면 처량할 뿐 옛 물건은 없어라 창고에는 불이 나서 비단 생초 재가 되고 큰길에는 죽은 귀인 뼈만 밟히네 #300년대에는 투르판에선 이란 사산제국이 주조한 은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합니다 혜립은 현장이 장안을 떠나 투르판에 이르는 여정을 기록 스승 현장의 홀로 길을 가는 공포감을 생생히 기록했는데 혜립의 의도는 스승의 신앙을 기록하기 위해 여행의 위험을 과장해서 기록했다 베제크리크의 천불동은 5세기에 건립 벽화가 일부 남아 있으뿐이다 중국에서 가장덥고 건조한 지역이며 한 여름엔 80°까지 올라가며 강우량은 20m 가량 내린다 멀리 보이는 산이 천산산맥 만년설이 보입니다 멀리 마을이 보이네요 중국인들이 만들었다는 가짜 화염산
화염산은 서유기에서 등장하는 손오공이 화염산 불기를 파초선 부채로 진압하고 불법을 정한 곳이 이곳이다 서유기는 서기 627년 경전을 가질러 인도로 가는 삼장법사이야기이다 투르판 가는길 ... 이슬람양식 소공탑 현장이 국문태 부탁으로 한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하던 장소 .왕은 현장에게 이 나라에 머물러 달라고 설득했으나 현장은 왕을 제한을 사양했고 두사람의 논쟁이 이어졌고 떠나겠다는 현장에게 협박도 해보고 궁궐에 연금시키고 매일 직접 식사를 들고 갔으나 현장은 사흘 동안 먹을 것 마실 것 거부하여 넷째 날에 투르판에 한달 더 머무르고 그동안 《인왕경》이라는 경전을 가르칠 것이며 왕은 20년 동안 여행에 충분한 돈과옷과 함께 왕이 새로 임명한 승려26명의 행자로 하여금 현장을 수행하도록 했다 서투르크 카간들에게 24명의 제후욍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현장이 도착하면 잘 대접...
Read moreWe came here on a hot clear day and strolled the ruins almost entirely alone. Whilst the ancient village isn't much on paper, the atmosphere and proximity to the buildings feels very special. Probably it will all be roped off before long, for now it's all there to admire up close. Is hard to believe this was a place thriving in a very remote desert some 40...
Read moreGaochang ( chinois : 高昌 ; pinyin : Gao Chang ), également appelé Qara-hoja ou Kara-Khoja (قاراھوجا en ouïghour ) , située à 45 km au sud est de Turfan, sur la rive nord du désert de Takamaklan, a été fondée au Ier siècle av. J.-C, durant la dynastie Han.Ville animée, elle était une étape majeure pour les commerçants des caravanes. Une importante communauté chinoise a vécu à Gaochang entre le début du Ve siècle et l’an 640, date de la conquête de la ville par la dynastie des Tang. Gaochang fut longtemps la plus grande ville du Xinjiang. De 850 à 1283, elle fut la capitale prospère de l’ancien Royaume ouïgour. Mongols et Ouïgours commencèrent à se convertir à l’islam et détruisirent des œuvres d'art et des manuscrits qu’ils y avaient trouvés, craignant d’être accusés d’idolâtrie. Les remparts en terre ( 12 m d'épaisseur, 11 m de hauteur), percés de 9 portes, forment un carré de 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