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하구에 위치한 강화도의 지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해양세력들의 외침으로부터 한성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가치는 절대적이라 할 것입니다.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는 군사적 전문지식이 없는 나와 같은 문외한이라도 한눈에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화도 내에 구축된 어느 돈대든 방어수단으로서의 중요성은 그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섬 전체를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많은 돈대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 초지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지진은 한양 방어진지의 최일선에 위치한 척후병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이 차면 뱃길이 어디든 닿을 것 같으면서도 썰물이 되면 황량한 갯뻘이 건너편 김포 대명포구와 맞닿을 것 같이 가깝게 보입니다. 그런 좁은 바닷길을 양 옆으로 초지진, 덕진진, 광성돈대, 용두돈대, 광성보로 이어지고 맞은편 김포에는 덕포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초지진이기에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언급된 곳이 초지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원된 초지진은 김포 대명항에서 강화방향 초지대교를 지나 오른쪽 해안에 위치해 있는데 초지진 성벽에는 서구열강 세력들이 무참히 쏘아대던 포탄이 성벽에 떨어져 큰 상처를 남긴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고, 수령 400여년 된 소나무 두 그루는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듯 큰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굿굿하게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초지진을 바라보면서 당시 서구세력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위치해 있던 조선의 근시안적 세계관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대(임진왜란, 병자호란) 국란을 극복한 후 자주국방의 일환으로 군제를 개편하여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을 설치 운영해 오다가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장용영을 설치함으로써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방력과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다운 모습을 갖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유지되어 오던 조선의 군사력도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쇠퇴합니다. 국방에 사용되어야 할 군비조차도 고종의 호화방탕한 궁중생활 비용으로 충당하기에 급급했고 나라를 지켜야할 군병들은 국왕 개인 호위병이나 의장행사병력으로 차출하였으니 어찌 나라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겠는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 또한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온갓 풍상을 견뎌낸 초지진이기에 초지진에 올라 크게...
Read more강화 초지진 (江華 草芝鎭) & 초지돈대(草芝墩臺)
주 소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지정번호 : 사적 지 정 일 : 1971.12.29. 시 대 : 조선시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소 유 자 : 국가유산청 관 리 자 : 강화군 수량/면적 : 4,242㎡
내 용
[ 국가유산청 ]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초지진 설치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초지진 → 강화 초지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리 뷰 # (개인적인 견해이므로 참고만 바랍니다.)
초지진은 3돈대 초지돈대ㆍ장자평돈대ㆍ섬암돈대를 포함하는 진지이다.
초지돈대 입구에 포격과 파괴로 폐허가 된 초지돈대, 초지돈대에서 바라본 덕진돈대의 원경 사진이 있는데 훼손이 심하다
초지진 내부에는 초지진 홍이포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초지돈대는 3개의 포구가 있으며 1문의 대포만 전시돼있다. 초지진에서 바다방향으로 보면 덕진진의...
Read more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이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 규모이며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의 주요 사건을 알아볼수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여러진이 있으면 각진마다 방문시 요금을 내야 합니다.... 팩키지로 묶어서 입장료를 좀더 저렴했으면 좋겠네요..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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