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ople there were really friendly. They didn't speak much English but they were very welcoming and walked us around. They pulled up water from the well and explained how the area was segregated. They had a video for us to watch about President Moon visiting and I guess making it an official historical site. It was in Korean but thats what it seemed like. Pretty cool. And not too far off there's another little site with a pagoda just outside, but the gate was closed so we didn't go in. If you walk there though, there's a tunnel to your right that goes to the main road. You can walk up that a bit to cross a bridge and get on the forest covered walking path. There's these beautiful floral mosaics on your left as you walk up that road with the river on your right. It was really hot when we went so we were very thankful when they told us about it. Otherwise we would have missed the turn and stayed out...
Read more'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안동시가 대외적으로 부르짓는 케치프레이즈 또는 슬로건입니다. 안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단히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구호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 안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동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충분한 답사를 해야만 안동의 자존심 정신문화의 수도가 내포하는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안동 문화를 이해할 정도의 답사를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2박 3일 정도는 시간을 투자해야 그나마 안동의 겉모습이라도 훓터 볼 수 있습니다. 안동지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얕은 지식과 개인 소견을 피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동은 고려 태조 왕건이 3태사의 절대적 도움으로 고창전투에서 승리한 후 후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곳입니다. 왕건은 3태사의 결정적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창으로 불리던 지명을 동쪽지방을 편안하게 했다라는 뜻이 담긴 안동이란 지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알고있는 안동은 마을 마을마다 반가가 아닌 곳이 없고, 양지 바른 집 터는 어김없이 종가집이 자리하거나 고관대작이 거처한 고택이 아닌 곳이 없으며, 산세 좋고 풍수 좋은 곳은 서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최고의 명산자락과 계곡에는 이름난 양반가의 묫자리와 신도비, 제실로 넘처나는 곳이 안동입니다.
그러나 안동이 안동다울 수 있었던 것은 고려 후기 회헌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들여오고 이를 공부하던 고려 말기 신진세력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에 의해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자리하면서 입니다. 조선 건국과 함께 발전해 온 주자학이 마침내 퇴계 이황 선생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런 고장이기에 안동은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정신적 수도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안동을 이야기하면서 주자학만으로 매듭짓는다면 그야 말로 안동을 겉핡기만 한 것입니다. 안동은 한반도의 역사적 고비 고비마다 국난극복의 중심에 선 인물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3태사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일본(왜)과의 환란에서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안동이 배출한 인물들입니다.
7년 전쟁으로 일컫는 임진왜란 때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난에서 슬기롭게 국난을 극복하고 후대에게 전쟁을 경계하라는 징비록이란 기록물을 남긴 서애 류성룡,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과로로 순직한 학봉 김성일을 비롯한 안동의 많은 선비와 의병장들의 활약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한민족에게는 절대 잊힐리 없는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36년간 국권이 유린 당할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항일 광복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 바친 투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집안 집안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안동이 갖는 역사적 사실과 학문적 사상, 항일투쟁 정신을 담은 가문 중 대표적인 가문 한 곳이 임청각이 있는 고성 이씨 집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군자정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당숙, 동생, 아들, 조카, 손자 등 4대에 이르는 총 9분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되었으니 어찌 우국충정의 뜻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임청각은 중앙선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사대부가 가질수 있는 최대규모인 99간을 자랑하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부설된 중앙선 철도로 인해 상당부분이 멸실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움만 남는 그런 곳이 임청각입니다. 그런 임청각을 현직 대통령이 3.1절 기념식에서 언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직 대통령이 언급한 사항인 만큼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임청각이 옛모습으로...
Read more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임청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자처하였으며,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은 물론이고 99칸 짜리 임청각까지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무장독립투쟁의 중심에 서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임시정부 2차 개헌 때, 국가 수반)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입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 1368 ∼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지은 별당형 정자이며, 안채는 용(用)자가 옆으로 누운 형으로 되어 있고, 별당인 군자정은‘丁’자 형으로 되어 있는 집입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전통한옥이며,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임청각의 맥을 끊겠다며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도를 놓는 바람에 50여칸이 강제로 철거되었습니다.
임청각 당호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입니다.
임청각은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 대한민국의 혼을 내뿜는 곳 전통적인 기품과 낭만적 운치를 간직한 곳 마음의 여유와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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