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전불시대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서, 634년에 용궁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는 모전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Read more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졌다.분황사가 세워진 해에 선덕여왕은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새로 바꿨다. 분황사는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芬) 임금님(皇)의 절(寺)'로 선덕여왕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 분황사는 6세기 진흥왕 때 먼저 지어졌던 황룡사의 바로 북쪽에 건설되어 담이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찰은 황룡사가 더 먼저 세워졌으나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세운 이후에 건설되었다.
이후 경덕왕 14년(755년) 거대한 약사불상을 새로 주조하여 이 약사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다시 한번 분황사를 중수하며 동금당과 서금당을 철거하여 중금당의 규모를 늘리고, 아래의 넓은 터가 황룡사지이며, 위의 작은 숲이 분황사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승려 원효와 자장이 이 분황사에서도 활동했다. 원효는 이 곳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 (원효회고상)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데.. 또한 황룡사처럼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이 분황사에도 있었다.
분황사의 역사에서 원효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깨달음 얻고 돌아온 뒤에 머무른 곳이 분황사였고, 나 등 현전하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작도 분황사에서 집필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원효를 위해 '화쟁국사비' 비석이 세워진 곳도 분황사였다.
세워지기는 고선사의 서당화상비가 가장 오래되었지만 고선사는 현재 덕동댐 밑으로 수몰되었다. 이 화쟁국사비는 조선 후기 이전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추사 김정희가 '화쟁국사비가 있던 곳'이라고 남겨둔 글이 있다. 덕분에 분황사에서는 해마다 원효를 기념하는 재가 열리고 있다. 원효 관련 논문 중에는 아예 원효를 분황원효(芬皇元曉)라고 부른 것도 있다.
이후 몽골의 침략 때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분황사가 다시 복구된 것 같은데,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성민(洪聖民)의 계림록에서 분황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절에 높이 10척(약 3 m) 높이 금 불상과 높이 100인(仞)의 전탑이 있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을 말하는 것 같다. 이걸 전탑이라고 하면 틀린 거라 시험에서 함정문제로도 많이 나왔지만, 아무튼 전탑 모양을 흉내 내었기에 홍성민도 전탑으로 헷갈린 듯.
그러나 또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래 9층탑이었던 이 탑의 반을 헐었으며, 후에 분황사의 승려들이 처음부터 다시 쌓다가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인물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남긴 남정록(南征錄)에서도 분황사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고 탑은 허물어지고 1개 층만 남아있으며 커다란 동불(銅佛)만 우뚝 솟아 있다고 남겼다. 탑이 무너졌다는 건 동경잡기의 언급과 같고,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다는 금불에서 일본군이 금칠을 벗겨내 구리 불상만 남은 것으로 추정. 경덕왕 14년(775) 구리 30만 근 이상이 들어간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도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다.
이후로는 아주 작은 사찰이 되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절로 보이나,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작업들을 통해 현재 있는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깃발을 걸던 당간지주도 분황사 경내가 아니라 황룡사와 분황사 중간쯤에 있다. 오랜 기간동안 가람의 배치는 계속 변해왔으며, 전성기 면적은 황룡사의 2/3정도에...
Read moreThis Buddhist temple was built in 7th century Silla dynasty. Many buildings and relics were lost late 16th century during the Mogolian invasion and the Japanese invasion. Mojeon Stone Tower is still remaining as National treasure No.30. An old well in the middle of the Bunhwangsa yard still remaining but stopped being used since 1980s. One of the Buddha's statues found inside another well is now displayed in the yard of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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