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호. 낭산(狼山) 남동쪽 기슭에 있으며, 망덕사지(望德寺址)의 북서쪽 약 300m 지점에 있다. 절터의 남쪽은 낮은 밭인데, 여기에 2수의 목 없는 귀부(龜趺)가 있고, 서쪽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마을의 민가 사이에 서 있다. 사찰은 동서로 대부분의 초석을 남긴 사방 3칸의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완전하게 초석이 남아 있는 금당지(金堂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쌍탑식(雙塔式) 가람(伽藍)배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금당지 북쪽에 동서로 다시 사방 3칸의 작은 건물 기단이 있어 특수한 배치를 한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금당 북쪽의 건축은 좌우 경루(經樓) 또는 경루와 종루(鐘樓)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와당(瓦當)과 무늬 전석(磚石), 특히 녹유사천왕상전(綠釉四天王像磚) ) 등은 매우 정교하여, 당시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세운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기록된 사천왕사 건립설화를 보면,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경주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년(문무왕 15) 당(唐)나라는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50만 대군으로 신라에 침공해 왔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이곳에 사천왕사를 짓고 국가의 진호(鎭護)를 위한...
Read more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Read moreIt’s at nearby the royal tomb of Queen Seondeok. I saw a couple taking their wedding picture at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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