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역사
양화진은 조선시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었기에 영조 30년(1754년) 군진이 설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양화진까지 들어 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젠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있다.
1890년 7월 미국인 의료선교사 헤론이 사망하자 미 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몇 차례의 담판 끝에 한양에서 멀지 않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양화진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근대화 발전을 진력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소가 있는데, 이들은 복음전파와 성경번역, 교육과 의료사업, 그리고 당시 조선의 국권 회북을 위해 헌신했다.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1985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양하진외국인묘지 소유권을 증여받았다. 재단은 양화진을 개신교 성지로 가꾸기로 결정하고, 1986년 한국 교회 성도들과 재계 인사들의 헌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 했으며, 당시 서울유니온교회로 하여금 묘지를 관리 하면서 선교기념관에서 예배 하도록 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정부와 서울시에 양화진 일대를 명실상부한 개신교 성지공원으로 조성해 줄 것을 거듭 청원하였다. 그 결과 2003년 서울시와 마포구는 개신교의 양화진외국인묘지와 천주교의 절두산성지를 아울러 '양화진성지'로 명명하고, 두 성지 사이에 양화진성지공원을 조성했다.
재단은 2005년 7월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여 양화진외국인묘지와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 순교자기념관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여 명신공히 개신교 성지로 가꾸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재단과 100주년기념교회는 마포구청과 협의하여 이 묘원의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정했으며, 관련 규정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묘원 개요 명칭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함정동 144 일대 면적 :13,224m 안장자 수: 417명(선교사 및 그 가족 : 145명) 최초 안장자 : 1890년 7월 28인. 존 헤론(John W. Heron), 미국 선교사 안장자 출신 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진랜드, 덴마크, 듀인, 러시아, 미국,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호주, 대한민국(15개국) 선교사 출신 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스웨덴 ,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7개국) 소유 :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관리 :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개원 시간 월요일 -토요일( 오전 10시- 오후 5시) 묘원 안내시간 월요일- 토요일 I 오전 10시, 1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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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more파란눈의 한국인 호머 헐버트박사님 묘역이 있는곳 입니다. 영원한 한국인. 2023년이 추모 74주년 입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1999년 8월 4일 동아일보 13면 기사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 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내탕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을 되찾아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그것을 찾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후였다. 설사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겪은 초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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