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가슴을 쓰러내리게 했다는 1919년 3월 1일.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발생한 비폭력적 독립운동이든 그렇지 않은 독립운동이든 3.1운동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고종의 사망과 장례.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결코 지울수 없는 역사적 현장인 덕수궁과 이태왕 아니 고종의 발자취를 더듬는것 조차 호사스럽다고나 할까.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총 한발 쏴 보지도 않고(이 발언이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회자된 바 있는데 대한제국 정부차원에서 총 한발 쏘지않고 고스란히 나라를 바쳤다는 표현은 맞는 말입니다) 일본제국에 나라를 바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고스란히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는 을사오적도 아닌 고종 자신입니다) 그 직접적인 책임자는 누가 뭐래도 고종입니다.
매국의 여러 물적 증거는 넘쳐나지만 짧은 지면에 다 쓸수 없는 노릇이고 간단하게 단 하나의 문건을 제시한다면 대한제국 헌법 전문일 것입니다. 몇 조문 되지도 않은 헌법전문에는 대한제국의 영토, 신민, 군통수권은 말할것 없고 한반도 내의 모든 권한은 대한제국 황제에게 귀속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가 어떠한 방법으로 일본제국에 넘어갔든 헌법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종이 내린 결정이니 결국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는 고종인 것은 피할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뜻깊은 3월 1일. 고종이 거처했던 덕수궁을 채 여섯달이 지나지도 않아 다시 찾았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500년 조선 역사에서 잃어버린 왕실의 자존감을 다시 새우기위해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붓듯 재건한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내팽겨치고 옹색하고도 궁색한 덕수궁을 고종은 왜 정궁으로 정하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했을까? 그 이유를 찾기위해서는 덕수궁을 찾아야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는데 덕수궁 주변을 둘러보면 고종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민비가(명성황후라 부르는 분들도 있지만 그녀가 조선후기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결코 명성황후라 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일본의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자 고종 스스로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찾은 곳이 바로 덕수궁입니다. 덕수궁에 온 후 고종이 선택한 것은 어느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을 할까 각국 공사관에게 의사 타진하는 일이었습니다. 덕수궁 주변에 위치한 영국, 미국, 프랑스공사관 등 무려 5개국에 모두 7회에 걸쳐 파천을 시도하다 마지막 성공한 곳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일국의 군왕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하여 옹색하기만한 덕수궁마저 떠나 아관파천한 사건은 상식을 가진 일반 무지렁이 백성이라도 이해하기 힘든 일 일것입니다. 덕수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중명전의 위치가 위의 모든 사건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데 덕수궁 뒷쪽 담장을 경계로 영국대사관이 자리하고 있고 덕수궁 옆으로는 미국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덕수궁과 중명전 사이에 미국대사관이 끼여있는 형상입니다. 중명전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 입간판이 서 있습니다.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에 포함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 공사관이 자리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다.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전, 만희당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 이후 중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1907년 강제 퇴위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Read moreThis beautiful, unique building was the royal library of the Deoksugung Palace at the late XIX century. Jungmyeongjeong or "Hall of everlasting brightness" was constructed by Afanasy Seredin-Sabatin, a Ukraine born architect, steersman-pilot and reporter, who was the first European (Ukrainian and Russian) architect to work in the Korean Empir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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