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of the street foods in Busan that we always talk about since our visit more than 10 years ago.
We came back and found that there are now three different stalls at the same spot, so we sampled from each one. The stall with “Since 1987” is the one we visited back then, and it’s still our favourite, we personally love the seed hotteok from this stall the most.
The “Since 1983” stall presses the hotteok a bit too much, which affects the texture of the dough. The third stall, which had the shortest queue, was actually decent too, but the dough lacked the slight salty flavour we liked in our...
Read moreThis food is the representative street food of ‘Nampo-dong’. I think, I can say this is the representative street food of ‘Busan’ maybe. It is super delicious and yummy. Once you bite, you cannot stop it. The taste and how to cook is similar to ‘Churro’ in Spain. And it added more sugar paste and several kinds of peanuts. So if you have an allergy to nuts, you cannot enjoy this food. And as local people, who really love this food, all shops show similar taste, so if this store has long queue, please go to other store and you also can enjoy delicious...
Read more줄 겁나김 줄서서 먹을 만한 정도인지는 의구심이 듬
옛 서역인들이 먹던 음식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호떡의 '호'자가 '오랑캐 호(胡)'자이며 오랑캐가 먹던 떡이라는 주장이다.[2] 참고로 몽골에서도 호떡을 먹기는 한다. 다만 주로 식사용으로 먹는 경우가 많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 인도, 아랍 등지의 지역을 서역(西域), 이 곳 사람들을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는데 한나라에서 서역과 왕래하며 들어온 빵음식을 호병(胡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밀가루가 보급되면서 중국 북부에서는 제법 흔하게 먹는 음식이 되었는데, 한국에서처럼 달달하게 먹기도 하지만 고기나 야채를 넣어서 간단한 한끼식사로 먹기도 하며, 모옌의 작품 등 중국의 여러 문학작품에서도 이를 엿볼수있고, 차이나 타운에서 이러한 식사용 호떡을 고기호떡으로 팔기도 한다. 이 음식이 정확히 언제 우리나라로 들어왔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수습때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을 통해 청나라 화교 상인들과 함께 들어온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으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화교상인들이 흔히 할수있는 장사가 호떡이었기도 했다. 출처: 문화재청,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서역의 음식 - 호떡
이것때문에 유래된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속담이 있다. 불구경하듯 바깥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구경한다는 의미의 호떡집에 불났다는 해묵은 혐중 감정의 근원인 1930년대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이 있다. 원래 쌀을 주로 재배하는 한반도에서는 밀이 귀하고 사탕수수나 사탕무를 재배하지 않아 설탕이 부족했던 한반도에서 화교 상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해온 밀과 설탕은 사실상 중국 상인들만 취급하던 고급 식재료였고, 중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일할때 근처에 세운 노점에서 구운 호떡은 한국인들에게 별미이자 선물감이었다. 국밥이 15전,20전 할때 호떡 한장이 5전이니 당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저리가라 할만한 사치품이었던 셈. 그런 귀한 별미를 독점해 돈을 긁어가는 화교 장사꾼을 보는 심정이 당연히 좋았을리가 없고, 기름을 많이 쓰는지라 화재가 잦은 호떡 노점에 불나는 일은 그야말로 남의 일이자 속으로는 신나는 불구경인 것이다. 게다가 평상시에도 시끄러운 중국인들이 불이 나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저절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일제강점기 일본은 당연히 이들을 관리하기보다는 갈등을 부추겨 디바이드 앤 룰을 하려고 하니 그때부터 중국인과 조선인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짱깨가 중국인 비하명칭이 되듯 호떡집에 불나면 구경하기 바빴던 것이다.
점차 세월이 흐르고 현재는 한국식으로 로컬라이징 되어 다양한 종류의 호떡 문화를 개발하며 이어지고 있다. 상술한 1930년대 호떡 붐은 40년대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물자수탈이 심해지자 아예 자취를 감추고,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설탕이 들어오면서 한국인들이 조리과정이 복잡했던 과거 호떡을 단순화하여 변경한 것이다. 원조 화교식 호떡은 지금 알고 있는 호떡이 아니라 페스트리처럼 겹겹이 층을 만들어 굽는 식으로 이마트가 대만에서 수입한 피코크 계피호떡이 당시 레시피와 가까운 원조 화교식 호떡이다.[3] 고려시대 벽란도를 드나들던 아랍인이 먹던 주식을 회회(回回)떡이라 했는데 이것이 호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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