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chungdan Park in Seoul is a beautiful, green oasis that’s perfect for a relaxing stroll. The lush surroundings create a calming atmosphere, making it an ideal spot to unwind away from the city’s hustle and bustle. Whether you’re looking to take a leisurely walk, enjoy nature, or simply relax on a bench, this park is a lovely place to spend some time. It’s a fantastic escape and a must-visit for anyone looking to enjoy a peaceful moment in the heart...
Read more장충단 공원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9월 대한제국 고종이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종은 어영청의 분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영관 이경호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했으나, 다음해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1908년 제사는 중단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거국적인 국민대추도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국민대추도회 추진 세력들은 장충단에 이토의 사당을 짓고 추모제를 지냈다. 한일 병합 후인 1919년에는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이 조성되었다. 창경궁과 유사하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가 위락 시설로 바뀌었다. 일본은 공원에 상하이 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도 1932년 인근에 세워졌다. 해방 후 일본 군인들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사당의 부속건물이 파괴되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는 영빈관 내에 있던 장충단비를 수표교 옆으로 옮겼다. 1957년 5월 25일 제1공화국 자유당의 독재에 성토하기 위해 야당의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로 서울 시민에 약 20만여 명이 모인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전무후무한 여당과 결탁한 유지광과 동대문사단이 장충단집회사건을 일으켰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전 4월 18일 장충단 공원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김대중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유세대결이 유명하기도 하다.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라고 말했다. 이후 유신헌법이 발효되었다. 장충단의 처음 위치는 유실되었으나, 지금의 장충단 공원 남쪽 끝인 어린이야구장 건너편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 공원 입구에 남아 있는 장충단비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씨는 대한제국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것이다. 비 뒷면에는...
Read more장충단공원 서울시 중구 장충동2가 서울 남산 동북쪽에 있다. 1900년(광무 4) 9월 고종이 창설했다.장충단은 본래 초혼단으로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순사한 홍계훈.이경식 두 사람을 위시하여 국가를 위해 전사한 충신.열사를 모시고 1년에 두번씩 조재를 지내던 곳이다.또 이 보다 앞서 영조 중기부터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이곳에 있었다.현재는 조망이 뛰어난 공원으로 산책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특히 약수터가있다.
#장춘단터(장충단지) 임오군란.갑신정변.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광무 4년(1900) 설치했던 제단터다.
#장충단비 지정번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 시대/1900년(광무 4) 소 재 지: 서울시 중구 장충동2가 197번지 을미사변 때 순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장충단에 세 운비석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평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사망했다.고종황제는 1900년(광무 4)에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 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 글씨는 당시 황태자 였던 순종황제가 쓴 것이다.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수표교
지정번호: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시대 조선 전기
(태종세종 년간)
소 재 지: 서울시 중구 장충동2가 197-1
이 다리는 청계천을 가로 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정하던 관측기구인 수표를 세우면서 수표교라 불렀다.한양도심을 흐르는 개천(지금의 청계천)의 다리는 조선 초에 토교나 목교로 지었다.하지만 태종 년간부터 석교로 교체했는데 수표교도 태종세종 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