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鐘閣)이라는 지명은 종로1가 네거리 동남쪽 모퉁이에 보신각(普信閣)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종로’(鐘路)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종각 일대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의 왕래가 이어지는 서울의 중심거리 중의 중심거리이다.
종각은 조선 건국 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세워지긴 했으나, 오늘날 종로로 이어져오는 종각의 역사는 조선 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종루는 태조 5년(1396) 지금의 인사동 입구인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처음 세워졌는데 당시 규모는 2층 누각에 5칸 건물이었다.
이때부터 종루에 종을 걸어 아침저녁으로 울리기 시작했는데, 저녁 10시에는 인정(人定)이라 하여 28번,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라 하여 33번을 울려서 시간을 알리고 사대문을 열고 닫았다. 도성 안의 하루의 시작과 끝이 종소리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 13년(1413) 도성의 중심로를 따라 행랑(行廊)을 지으면서 광통교 북쪽 운종가(雲從街), 현재의 종로 네거리로 종루를 옮겨 세웠다.
이때에는 시간을 재기 위한 물시계(누기(淚器))도 함께 설치하였는데, 그 기능이 정확하지 않아 불편을 거듭하다가 세종 19년(1437)에 이르러서는 경복궁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간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세종 22년(1440)에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다시 지으면서 동서 5칸 남북 4칸으로 규모를 확대하여 위층에는 종을 달고 아래 누(樓) 사이로는 인마(人馬)가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단층의 기와집이나 초가로 이루어진 당시의 주변 환경 속에서 우뚝하게 솟아 당당한 위용을 자랑했을 이 종루는 아쉽게도 임진왜란으로 그만 불타버리고 만다.
그후 광해군 11년(1619)에 단층 종각으로 다시 지었으나 그마저도 숙종 12년(1686)에 화재로 사라져 새롭게 중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 6년(1869)에는 운종가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해 종각 역시 주변의 시전 건물들과 함께 소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건립하였다.
1895년 3월 고종은 이 건물에 ‘普信閣’이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오늘까지 보신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의 보신각은 단층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였다.
그후 1915년에는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약간 뒤로 이동했으며, 그것이 한국전쟁 때 파괴되자 1953년에 다시 뒤로 물려 중건하였다.
1978년에는 대지를 145평에서 850평으로 확장하게 되는데, 이때 건물이 또다시 뒤로 밀리면서 철근 콘크리트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을 서북향으로 세우게 된다.
이것이 지금의 보신각이다. 현재 규모는 건평 72평 연건평 144평이며, 건물의 기단 위에는 석조 난간을 두르고 사면의 중앙으로 5단의 계단이 놓였다. 또 1층 좌우 협칸 북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목조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종은 2층에 걸었다.
옛 건물에서 ‘각’(閣)이란 단층집이나 2층집의 1층을 가리키며, ‘누’(樓)는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집을 지칭한다.
때문에 지금의 구조로 보자면 보신각은 오히려 ‘보신루’ 혹은 ‘종루’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편액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글씨이며, 보신각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다.
종루에 종이 처음 걸린 것은 태조 7년(1398)으로 당시 남한산성의 주조소에서 제작한 종을 1,300명의 군졸을 동원하여 10일에 걸쳐 옮겨 걸었다 한다.
그런데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종을 놔둔 채 세조 4년(1458)에 새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그때의 종은 임진왜란으로 도성에 침입했던 왜병들이 퇴각하면서 종루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파손되었다.
그 뒤 광해군 때 종각이 복구되면서 지금의 명동성당 앞 고개인 명례동현(明禮洞峴)에 있던 종을 옮겨왔다. 이 종은 원래 세조 14년(1468)에 주조한 원각사 종으로 절이 폐사되면서 여기저기 떠돌던 것이었다.
바로 이 종이 지금의 보신각 종으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은 고종이 종각을 보신각이라 이름한 뒤부터이다.
보신각 종은 광해군 때 종각에 걸린 뒤로도 조선 말기까지 네 차례나 종각에 불이 나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이나 음향에 손상을 입게 되어 근래에는 경축일이나 기념일에만 타종한다.
그 소임마저 1985년 이후에는 새로 만든 종에게 넘기고 지금은 경복궁 문화재연구소 뒤뜰로 옮겨져 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보신각 종은 높이 3.18m, 입지름 2.28m, 무게 19톤에 달하는 큰 종이다. 양식적으로는 조선 초기 왕실에서 주조한 종들, 예를 들면 흥천사 종, 봉선사 종, 낙산사 종과 마찬가지로 중국 종의 요소가 많이 섞인 한중 혼합식 종에 속한다.
종고리인 용뉴가 두 마리 용으로 되어 있는 점, 종 몸체의 상·중·하단에 각각 한 줄, 세 줄, 두 줄의 융기선을 돌린 점, 천판이 불룩하게 솟은 점, 종을 치는 지점인 당좌(撞座)가 없는 점이 이 종에 보이는 중국적인 요소이다.
애초에는 종의 상단 여백에 보살상과 아홉 개의 연꽃봉오리가 솟은 연곽이 네 군데씩 있었겠지만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된 탓인지 지금은 보살상 하나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종신 중앙의 세 줄 융기선 아래로 긴 명문이 남아 있어 종을 만든 연대와 관계자들을 알 수 있다. 주종연대는 앞서 밝힌 대로 성화(成化) 4년, 곧 1468년이며, 관계자들은 상당 부분 흥천사 종, 봉선사 종, 낙산사 종과 겹쳐짐이 확인된다. 보신각 종은 보물 제2호이다.
조선 초기 서울에는 다섯 개의 큰 종이 있었다. 첫째는 태조 7년에 주조한 대종(大鐘)이고, 둘째는 태종 12년에 만든 경복궁의 광화문 종, 셋째가 세조 4년에 주성한 경복궁의 사정전 종, 넷째가 세조 8년에 주조한 흥천사 종, 다섯째가 바로 지금의 보신각 종이다.
이 가운데 태조 7년에 만든 종과 광화문 종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고, 금이 간 채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던 사정전 종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했던 당백전(當百錢) 주조에 녹여 썼기 때문에 지금은 흥천사 종과 보신각 종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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