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hyeongung Palace, located in Unni-dong, Jongno-gu, Seoul, as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Historic Site No. 257, is the residence of King Gojong, the 26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private residence of Heungseon Daewongun.
It is the cradle of Heungseon-gun Lee Ha-eung's realization of royal rule and the place where he carried out his will to reform from the position of Daewon-gun to the royal capital politics after taking power. It is a place where Daewongun continued to exert political influence at home and abroad even after he resigned from power, and because it was the place where King Gojong lived until his accession to the throne, it has a greater historical symbolism.
It was on December 9, 1863, that Heungseongun's sister-in-law came to be called Unhyeongung, when the Gyoji was issued giving Heungseongun the title of Heungseon Daewongun and his wife Min as the military wife. Unhyeonggung is also the detached palace where the wedding ceremony of King Gojong and Empress Myeongseong was held.
By...
Read moreUnhyeon Palace or Unhyeongung is the least known of the Korean palaces in Seoul. However, it is a beautiful place with a very rich history.
It hosted several important events and important guests like King Kojong and Queen Myeongseong, and it was the residence of the father of King Kojong known as Daewongun.
The palace is quite small compared to the fellow palaces, but it has its unique charm.
There are often cultural activities organized here, like the traditional dance performance shared in my pictures.
You can find this palace right outside Anguk Station, so do not forget to add it to your travel list.
Follow my IG for more cool places to visit in Seoul and the rest of...
Read more운현궁. 고종이 태어나고 자라던 곳이자 흥선대원군의 거처지인 운현궁. 철종이 재위를 넘겨줄 아들이 없이 서거하자 장조(사도세자를 추증)와 숙빈임씨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 은신군(정조의 이복동생)과 군부인 홍씨 사이에 아들이 없자 양자를 들인 이가 남연군인데 남연군과 군부인 민씨 사이에 태어난 넷째 아들이 흥선대원군이고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 고종입니다. 즉 흥선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손자이고 고종의 아버지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조선의 국왕으로 만들기위해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 상기리 가야산에 묘를 이장하기에 앞서 지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가야산 가야사 석탑자리에 선친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곳인데 남연군 묘를 이장하니 과연 지관말 그대로 흥선대원군 후손에 황제가 두명이나 올랐습니다. 천자 2대는 두말할 것 없이 고종과 순종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각고의 노력끝에 둘째 아들을 군주로 만들었으니 흥선대원군의 권세야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운현궁과 관련하여 구한말 유학자 매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앞부분 생략) 철종 초기 장안에 두 가지 소문들이 나돌았다. 하나는 관상감 터에는 성인이 나온다 했고, 운현궁에는 왕기가 서려있다고 했다. 그런 뒤에 고종이 탄생했다' 라고 일기장에 기록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 란 다섯자가 3천리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 같아 관리나 일반백성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라는 기록도 있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 이하응이 그 터를 넓히고 새로 단장하여 주위 담장이 수 리(1km는 약 2.5리 임)나 되었고, 네 개의 대문을 설치하여 궁궐처럼 엄숙하게 했다' 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의 권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대원이대감으로도 불리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이야기는 매천 황현이 전라남도 광양에 기거하면서 일기형식으로 쓴 기록물인데 한양으로부터 전해지는 소문이나 이야기를 날짜별로 써 놓아 그 내용이 다소 과장되거나 사실관계가 불분명한 부분이 다소 있지만 당시 조정이나 한양은 물론 지방 유생과 백성들의 민심을 읽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매천야록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관계와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매천야록을 비교하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릅니다.
어찌되었든 최익현의 고종 친정을 상소하는 내용으로 촉발된 고종의 친정발표로 한순간 권력 밖으로 밀려나는 아픔도 겪었을 흥선대원군. 고종 친정 발표 후 벌어지기 시작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다툼은 근현대 조선과 역사바퀴를 같이합니다. 뿐만아니라 청나라까지 압송되다시피 한 쓰라린 경험과 군왕인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말년의 삶으로 권력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꼈을 법합니다. 그런 흥선대원군의 삶을 그대로 간직한 운현궁은 축소되고 쪼그라들어 최소화된 지금. 운현궁 사랑채 노안당은 그래도 군왕의 아버지라는 자리의 무게를 느끼고도 남을만 합니다.
대원군이 앉아서 대리청정을 했을 법한 자리에는 한 단을 높혀 자리를 만들었고 단 뒷쪽 천정 가장자리 벽 밑에는 흥선대원군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무량수각을 표구해 걸어두었는데 무량수각이라 쓴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시에게 써 준 현판이 무량수각입니다. 그 무량수각은 대흥사 대웅전 옆 가람 처마에 걸려있습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사랑채에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스승 추사의 글씨체를 모사하여 쓴 글을 걸어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노안당 바닥에는 붓과 벼루 그리고 지금 난을 바로 친 듯한 그림 한폭이 바닥에 깔려있는데 이하응이 그렸다는 그 유명한 난 그림입니다. 동양난은 오른쪽으로 빧은 난을 우란이라하고 왼쪽으로 뻗은 것을 좌란이라 합니다 난이 뻗으면서 세번 꼬인 것을 삼전란이라 하는데 난을 배운 후 30년은 지니야 삼전 우란을 칠 수 있고 그 뒤로 다시 30년을 더 배워야 비로소 삼전 좌란을 칠 수 있다 합니다. 그런데 석파 이하응의 난 솜씨는 어찌나 뛰어났는지 석파의 삼전 좌란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힙니다. 그런 대원군을 평가하기를 한국사에서 개혁에 가장 성공한 영걸이라고...
Read more